그녀의 여행 가방에 떠밀려 그의 메모 용지 보관함들이 몽땅 도선사용 침상 한쪽 끝에 몰려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메모 용지 보관함들은 그가 현재 집필 중인 책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들로, 메모 용지들을 가지런히 꽂아둘 수 있는 네 개의 기다란 도서관 색인용 카드 보관함과 같은 모양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가 침상 가장자리에 걸린 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나한텐 저것들만큼이나 소중한 게 따로 없지. 그가 생각을 이어갔다. 약 3천 장에 달하는 가로 6인치 세로 4인치의 메모 용지들이 쏟아져 온통 바닥에 흩어지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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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장에서라면 이 메모 용지들을 포기하는 쪽보다는 차라리 배를 포기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메모 용지들은 약 1만 1천 장이 되었다. 이 메모 용지들은 거의 4년의 세월에 걸쳐 정리하고 다시 정리한 다음 또다시 정리하는 과정에 축적된 것들로, 수도 없이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이 모든 메모 용지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이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차라리 포기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는 이들 메모 용지의 내용을 포괄하는 명칭을 "질의 형이상학" 또는 '가치의 형이상학'이라 불렀으며, 시간 절약을 위해 때때로 그냥 "MOQ"^[Metaphysics of Quality의 약칭.]라 부르기도 했다.
물가 저쪽의 건물들이 하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면, 여기 상자 안의 메모 용지들은 또 하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지. 이 "용지 안의 세계'는 나름대로 하나의 대단한 세계야. 그는 어쩌다 한때 이 세계를 거의 잃어버릴 뻔했는데. 이에 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이 세계를 구성한다 여겨지는 것들을 대부분 메모 용지에 기록하여 재구성해놓은 상태로, 그에게 이 세계를 다시 잃어버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이 세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도 온갖 새로운 정보들이 계속 밀려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러한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와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할 만큼 뒤엉켜 일종의 장애물 더미를 형성하기 전에 이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당면 과제였다. 이제 이들 메모 용지들의 주된 목적은 그에게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잊어버리게 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모순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메모 용지들의 목적은 머리를 비우는 데, 그러니까 과거 4년 동안의 모든 생각을 도선사용 침상에 보관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없게 하는 데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원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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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드로스가 제대로 된 크기의 종이를 사용하기보다는 메모 용지를 사용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를 담아놓는 메모 용지 보관함이 한결 더 편리하게 원하는 메모 용지에 접근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정보에 대한 쉬운 접근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임의적인 재배열이 가능한 작은 묶음 단위==로 정리해놓는 경우, 이를 어쩔 수 없어 순차적으로 배열해 정리해놓는 것보다 한결 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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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용지 가운데 몇몇 장은 바로 이 주제 — 즉, 비순차적 접근 가능성과 질의 문제 — 에 관한 것이다. 비순차적 접근 가능성과 질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도서관이야말로 문명 세계의 가장 강력한 도구
인데, 이는 바로 색인용 카드 보관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主) 색인 목록에 들어갈 카드의 숫자를 어느 순간에든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 허용되는 듀이 십진법 도서 분류 체계와 같은 것이 없다면, 도서관 전체는 곧 지리멸렬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마침내 사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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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 않아 그는 모종의 범주화 작업이 이뤄짐을 감지하게 되었다. 앞선다고 선택했던 내용을 담은 메모 용지들이 하나의 공통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뒤섞이게 되었고, 뒤선다고 생각했던 내용을 담은 메모 용지들이 다른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충분하게 많은 양의 메모 용지들이 하나의 단일 주제 아래 모이게 되어 이 주제가 항구적인 것이 되겠다고 느껴지면, 그는 메모 용지와 똑같은 크기의 색인용 카드를 한 장 꺼내 여기에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된 색인용 딱지 삽입 탭을 붙인 다음 탭에 딸려 공급되는 자그마한 마분지 딱지에 주제 명칭을 써넣고 이 딱지를 탭 안에 집어넣고는 딱지에 써놓은 주제와 관련 있는 메모 용지들과 함께 색인용 카드를 한 묶음으로 보관하곤 했다. 현재 도선사용 침상에 올려놓은 네 개의 메모 용지 보관함에는 탭이 붙어 있는 색인용 카드 4백 내지 5백 장이 메모 용지들과 함께 담겨 있었다.
(pp.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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