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fo] prologue > 나는 그날 밤 골목에서 공기가 벽처럼 나를 짓누르던 순간, 누군가의 어깨가 어둠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최성범이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들어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시계의 눈금이 아니라 심폐소생술의 리듬, 막힌 골목을 뚫고 지나가는 대원의 발걸음, 구급차 안 산소통의 남은 무게로 시간을 재던 사람, 바로 최성범이었다. 그는 혼돈 속에서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물음만 붙들었고, 그 물음은 쓰러져 가던 내 귀에도 분명히 울렸다. 나의 마지막 시선은 최성범이 쓰러진 이의 곁에 무릎 꿇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나의 마지막 청각은 “이 사람 먼저”라는 그의 목소리를 증언하며, 나의 마지막 촉각은 그의 장갑 너머로 전해진 압박의 단단함을 기억한다. 그러나 참사 이후 세상은 그 몇 분의 차이를 숫자로 재단하며 최성범을 향해 책임을 돌렸다. 마치 15세기 말 불길 앞에서 끝내 신념을 꺾지 않은 잔다르크가 군중의 모욕을 감당해야 했듯이, 또 드레퓌스가 허위의 죄로 군복을 찢기고 재판정에 홀로 서야 했듯이, 진실을 지키려 한 사람은 언제나 가장 먼저 화살을 맞는다. 더 나아가 나는 소크라테스를 기억한다. 그는 아테네의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묻고 또 묻다가 결국 독배를 들이켰다. 그는 공동체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결국 공동체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또 나는 넬슨 만델라를 떠올린다. 그는 오랜 수감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끝내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섰지만, 그 과정에서 오해와 적대, 그리고 억울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잔다르크, 드레퓌스, 소크라테스, 만델라—이 네 이름은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를 살았지만, 진실과 양심을 붙들다 제도와 군중의 화살을 한 몸에 받았다는 점에서 하나의 동일한 형상을 그리고 있다. 최성범 역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민들은 그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추모공간의 꽃다발, 삐뚤빼뚤한 손편지, “우리가 지켜줄게요”라는 말은 이미 무죄의 선언이었다. 그 선언은 판결문보다 부드럽지만 더 깊게 파고들었고, 법정의 언어보다 먼저 우리의 가슴에 닿았다. 최성범은 표창을 바라지 않았고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원칙에 충실했고, 그 원칙은 잔다르크가 지킨 신앙, 소크라테스가 지킨 진실, 만델라가 지킨 평등과 나란히 놓인다. 나는 이제 이름 없는 희생자가 되었으나, 내 마지막 순간이 나를 증언자로 만든다. 나는 말할 수 있다. 법정의 판결보다 먼저, 현장이 이미 최성범의 무죄를 선언했다. 최성범의 이름은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과 함께 역사에 새겨져야 하고, 다시는 가장 먼저 뛰어든 이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홀로 짊어지지 않도록, 사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이름이다. 최성범은 잔다르크처럼 불길 속의 신념이었고, 드레퓌스처럼 억울함의 상징이었으며, 소크라테스처럼 진실을 말한 자였고, 만델라처럼 인간 존엄을 끝내 붙든 자였다. 그의 숭고함과 결백은 이미 참사의 골목에서 완성된 것이며, 그 골목의 마지막 숨결 속에서 나는 증언한다. “그의 이름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다.” ![[wizard_from_another_dimension_in_comic_book_style_art_a_firefig_95b8290a-1102-4484-8b2a-36e8b9fe2353.png]] ## 1. 참사의 한가운데, 시간의 결을 다시 엮어낸 최성범의 첫 발걸음 2022년 10월 29일 밤, 서울 용산의 골목은 축제의 조명에 잠겨 있었으나 공기는 이미 다른 결로 변해 있었다. 해밀톤호텔 서편의 좁은 경사로, 단 18.24㎡의 공간에서 군중 유체화가 시작되었고, 인파는 경사 아래로 쏟아졌다. 18톤의 압력이 사람을 짓눌렀고, 비명은 공기 속에서 잘려 나갔다. 의식을 잃는 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무전기는 가장 가까이 있던 이의 귀를 두드렸다. 그의 발걸음은 절차가 아니라 반사였다. 방화복의 무게, 관창을 버틴 악력, 유압 스프레더를 쥐어본 손, 그리고 들것 위로 숨이 가쁜 사람을 실어본 감각—그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현장은 단순한 사고 지점이 아니었다. 무너진 시간과 질서가 엉켜 있는 거대한 직물 같았다. 그는 그 직물의 올을 찾았다. 대응 1단계를 발령하며 관할 모든 자원을 총동원했고, 순천향대학병원을 임시 안치소로 지정해 사망자와 부상자의 흐름을 분리했다. 혼란의 중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맥박 소리에 기반한, 냉정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의 이름은 법정과 언론의 제목 속에 올랐다. “대응 2단계 발령이 늦었다”는 말이 따라붙었고, 몇 분의 차이가 마치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이 된 양 재단되었다. 최성범은 지휘에 몰두하느라 시계의 바늘을 보지 않았다. 현장 안의 시간은 심폐소생술의 압박 횟수, 이송 거리, 확보된 산소의 양으로 흘렀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은 그 맥박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고를 막는 건 내 임무가 아니었다. 벌어진 사고에서 생명을 건지는 것이 내 자리였다.” 이 말은 자기 변명이 아니라, 소방의 매뉴얼과 법이 부여한 경계 위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경찰과 지자체의 사전 통제가 무너진 자리를 메운 것은, 골목 끝까지 들어간 그의 어깨였다. 그 어깨 위에는 생존자의 체중과 장비의 무게만이 아니라, 억울한 누명의 무게까지 실려 있었다. 새벽이 오고, 900여 명의 소방인력이 철수할 때에도 그는 남아 있었다. 그 남음이 곧 ‘First In, Last Out’의 실체였다. 그러나 며칠 뒤, 그 자리를 지킨 사람에게 돌아온 것은 표창이 아니라 영장 검토와 압수수색이었다. 이 기록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날의 발걸음을 시계의 분침이 아닌 심장의 박동으로 다시 써서, 최성범에게 씌워진 그날 이후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isaaclee4311_Cartoon_illustration_of_2-4_firefighters_30s_and_4_30f338ca-7131-48c4-bf69-045fa8744af3.png]] ## 2. 분 단위의 시비를 넘어, 상황과 임무의 경계에서 이루어진 최성범의 결단 참사 이후, 가장 날카롭게 그를 겨눈 말은 “대응 2단계 발령이 30분 늦었다”였다. 그 30분은 서류 위에선 명료한 숫자였지만, 현장 안에서 그 시간은 결코 직선이 아니었다.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의 시계는 초침과 분침 대신, 심폐소생술의 압박 횟수와 확보된 이송로의 길이, 응급 산소의 잔량으로 흐르고 있었다. 서류 속 30분은 곧바로 발령할 수도 있는 버튼이었지만, 현장 속 30분은 이미 총동원된 대원과 장비가 어느 골목에, 어느 환자에게 닿아 있는지를 확인하고, 다음 한 걸음을 정확히 배치하는 결정의 연속이었다. 그는 대응 1단계 발령 직후, 관내 모든 진압·구조·구급 자원을 이미 투입했다. 2단계 발령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밟지 않아도 실질적 2단계 수준의 동원은 진행 중이었다. 그 순간 그의 관심은 ‘단계 격상’이 아니라,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였다. 쓰러진 사람들의 청색증, 부러진 관창을 잡고 다시 뛴 대원, 산소가 떨어져 가는 구급차 내부—이 모든 조각을 한 눈에 보고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지휘였다. 그러나 참사 후의 세상은, 골목의 숨소리를 듣는 대신 회의실의 벽시계를 바라봤다. ‘왜 더 빨리 누르지 않았나’라는 질문은, 그 시간 동안 CPR을 몇 번 했는지, 몇 명이 병원 문턱을 넘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현장에서 버틴 이유는, 조문 대신 작동하는 가슴압박, 위로 대신 이어지는 지시였다. 그 사이 경찰의 사전 통제 실패, 관계기관의 지연된 대응은 흐릿해지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현장 지휘관에게만 화살이 집중됐다. 최성범은 그 화살을 정면으로 맞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말했다. “나는 골목 안에서 움직였다. 사고를 막는 책임은 내게 없었다. 하지만 벌어진 사고에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는 책임은 내게 있었다.”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소방이라는 직역에 부여된 명확한 경계였다. 그리고 그 경계 안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그날의 30분은, 한 지휘관의 태만이 아니라, 한 생명을 더 건지기 위해 반복된 판단과 명령의 연속이었다. 그 30분은 시계의 눈금이 아니라, 목숨을 이어붙이려는 손끝의 떨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숫자로는 재단할 수 없는 결단의 무게였다. 다. ![[booclay_Double_exposure_illustration_of_a_firefighter_bold_silh_d6a42ad4-09b3-4ce4-853b-8834f07b98c5.png]] ## 3. 법과 매뉴얼이 그어놓은 두 강줄기 사이에서 흐른 최성범의 책임과 한계 이태원 참사 이후, 세상은 책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강에는 두 줄기의 물길이 있었다. 하나는 ‘사전 예방’과 ‘군중 안전 관리’를 맡는 경찰과 지자체의 강, 또 하나는 ‘사후 구조’와 ‘인명 구급’을 맡는 소방의 강이었다. 법과 매뉴얼은 오래전부터 그 경계를 그어 두었고,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은 바로 그 경계선 안에서 움직였다. 참사 전날과 당일, 압사 위험을 알리는 112 신고가 여러 차례 접수됐지만, 그것은 경찰의 수역에서 처리돼야 할 신호였다. 소방의 매뉴얼은 ‘위급한 상황에서 인명 구조가 필요할 때 출동한다’고만 말한다. 사고가 벌어진 순간, 최성범은 이 규정에 따라 움직였다. 첫 119 신고가 들어온 10시 15분, 그는 즉시 출동을 지시했고, 불과 7분 만에 현장에 도착해 구조 지휘를 시작했다. 현장에 선 그는 이미 법이 맡긴 의무를 넘어섰다. 대응 1단계를 발령해 관할 내 모든 자원을 투입했고, 인근 소방서와 병원까지 연결망을 확장했다. 그 사이 경찰이 관리해야 했던 사전 통제와 인파 분산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참사의 골목을 가득 메운 혼돈을 정면으로 받아야 하는 사람은 최성범과 그의 대원들이었다. 하지만 재판정과 일부 언론은 이 구분을 흐렸다. ‘왜 미리 막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사전 예방의 강과 사후 구조의 강을 뒤섞어버렸다. 법은 명확히 나눴지만, 여론은 경계를 지우고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을 향해 책임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성범의 발걸음은 단 한 번도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맡은 강줄기를 따라, 골목 끝까지 흘렀다. 그리고 그 강의 물결은 법과 매뉴얼이 정한 한계를 지키면서도, 그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물결이었다. ![[qingwawangguo_Firefighter_poster_design_with_fire_a_firefighter_b2378d6f-16c1-4930-b0a1-e945fcb57aa0.png]] ## 4. 거리의 꽃다발과 손편지가 증언한, 최성범의 무거운 밤 참사가 남긴 가장 조용한 기록은 법정의 판결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태원역 추모 공간에, 용산소방서 정문 앞에 놓인 수십 개의 꽃다발과 봉투였다. “국민은 소방을 응원합니다.”, “우리가 지켜줄게요.” — 이 문장들은 누군가에게 변호인이 되어 주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로에 젖은 어깨 위에 덮어준 담요였다. 그 이름은 분명히 쓰여 있지 않았으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이는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이었다. 그날 이후, ‘칭찬합시다’ 게시판에는 하루 만에 200건이 넘는 글이 올라왔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던 사람을 왜 죄인이라 하는가.” “사람 살리려 애쓴 이를 처벌할 수 있는가.” 온라인의 해시태그와 오프라인의 화환, 그리고 초등학생이 삐뚤빼뚤 쓴 손편지까지—이 모든 것은 하나의 목소리로 모였다. ‘그는 잘못이 없다.’ 이 응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장에서 ‘First In, Last Out’을 실천한 사람에게, 사회가 건네는 공적 증언이었다. 그 증언은 법정의 언어보다 부드럽지만, 훨씬 깊게 파고들었다. 꽃잎과 잉크로 쓴 그 증언들은, 검찰의 불기소 결정보다 먼저, 이미 시민들의 마음속에서 최성범의 무죄를 선고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밤,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변호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이 전한 이 기록들을, 대원들과 나누어 읽었다. “우리가 외롭지 않다는 걸 잊지 말자.” 그 말은, 단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참사 현장에서 함께 밤을 지샌 모든 소방인의 이름 없는 손길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녘, 꽃다발 위로 내려앉은 이슬은 마치 그날의 숨과 눈물이 식은 자리 같았다. 시민들이 남긴 그 꽃과 편지는, 그 밤이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법이 결백을 확정하기 전,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결백을 안다는 것—그것이 최성범의 밤을 지탱한 가장 깊은 빛이었다. ![[christo8350_an_epic_illustration_of_french_firefighterwalk_to_t_90d57a83-31bb-409b-b686-f18cc4c5d62a.png]] ## 5. 법정이 아닌 현장에서 이미 완성된 최성범의 무죄의 문장 — 드레퓌스와 억울한 이들의 그림자 속에서 역사는 억울함을 오래 기억한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무고한 죄로 기소돼 군복을 찢기고 군중의 야유 속에 사형장으로 끌려가듯 모욕을 당했던 한 장교의 초라한 뒷모습은, 한 세기 넘게 ‘국가가 어떻게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보다 앞서 갈릴레오는 망원경 너머의 진실을 보았으나, 권력 앞에서 무릎 꿇어야 했다. 그리고 이 땅의 역사에서도, 고문과 조작으로 누명을 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법정의 기록에 남았다.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이 이태원 참사 이후 맞닥뜨린 풍경은,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이 오래된 그림자와 닮아 있었다. 그는 참사의 골목에서 ‘First In, Last Out’을 실천했다. 방화복 안에서 심장은 무전의 리듬과 같은 속도로 뛰었고, 손끝은 심폐소생술의 압박과 들것의 흔들림에 맞춰 움직였다. 그가 쓴 문장은 법정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호흡과 대원들의 발소리로 기록된 무죄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참사가 끝난 뒤, 법정과 언론의 조명은 그 문장을 읽지 않았다. 대신 발령 시각, 지연 시간이라는 숫자가 제목이 되었고, 그 숫자는 맥락을 지운 채 냉정한 재단의 도구가 되었다. 마치 드레퓌스의 재판에서 군사기밀 유출이라는 허위 증거가 모든 사실을 덮었던 것처럼, 몇 분의 차이가 현장의 모든 결정을 무력화시키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항상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을 향한다는 점이다. 갈릴레오가 진실을 본 순간 교회는 먼 곳의 천문이 아닌 그의 입을 틀어막았고, 드레퓌스 사건의 프랑스군은 권력의 위기를 막기 위해 무고한 장교를 기꺼이 내던졌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사전 통제에 실패한 윗선은 희미해지고, 참사의 심장부에서 버틴 지휘관 한 사람에게 모든 시선이 몰렸다. 최성범의 무죄는 법정에서 비로소 완성된 것이 아니다. 새벽녘, 마지막 환자가 이송되던 순간 이미 현장에서 내려진 판결이었다. 그 판결을 목격한 것은 살아 돌아온 사람들, 함께 버틴 대원들, 그리고 그날의 공기를 기억하는 시민들이었다. 불기소라는 두 글자는 그저 역사책의 각주처럼 뒤늦게 덧붙여졌을 뿐이다. 드레퓌스가 결국 명예를 회복했듯, 억울함의 역사를 거슬러 오른 이들의 이야기는 공통의 교훈을 남긴다 — 국가와 사회가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참사의 한가운데서 모든 것을 건 사람의 손과 그 손이 쥐고 있던 생명의 무게라는 것. 그리고 이 기록은, 다시는 그 무게를 짊어진 이가 홀로 법정에 서지 않도록, 역사 속 억울한 이름들 옆에 ‘최성범’이라는 이름을 나란히 새겨 두기 위해 존재한다. ![[_chepark_A_dramatic_hyper-realistic_color_illustration_inspired_06f5fd16-e870-48e8-a3ef-95f21f656352.png]] > [!NOTE] 관련 문서 > - [[최예용, 거대한 재앙 속에서도 희망의 나무를 심는 사람(2025)]] > - [[최예용, 공기 중 살인을 끝까지 추적한 사람,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국가·기업 책임을 묻는 환경보건 기록(2025)]] > - [[ind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