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택_adobe_midjourney_20250815.png]] ## 1. 출동과 귀소 사이, 기록되지 않은 현장의 온도가 반복을 조직하는 순간 도봉소방서 도봉구조대의 차체가 출동지령에 따라 창동 방향으로 미끄러져 나갈 때, 오기택은 이미 이 길 위에서 셀 수 없이 같은 계절, 같은 구간, 같은 시간대의 바람을 가른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붙임5 소방활동 실적 내역에 찍힌 날짜와 시간, 출동코드, 유형은 언제나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현장의 온도는 매번 다르게 그를 덮쳤다. 겨울의 찬 공기 속에 묻어 있는 가스 냄새, 여름밤에만 느껴지는 골목 전선에서 흘러내리는 미세한 열기, 방학동 벌집 제거 출동 전 골목 초입의 기묘한 정적 같은 것들. 이 온도들은 소방청 보고서에는 ‘특이사항 없음’으로 적히지만, 오기택의 신체는 그 결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귀소길의 도봉로 위, 차창에 맺힌 습기는 방금 전까지의 화재 연기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은폐하는 막처럼 얇게 드리운다. 그는 이 순간에도 방금 마주했던 창문 틈으로 손을 내밀던 노인의 손등 온도를 떠올린다. 그것은 기계가 측정한 화점의 섭씨가 아니라, 인간이 마지막으로 전달하는 체온의 문장이다. 그러나 관할 지휘부의 상부 보고는 다르다. ‘출동 15분, 화재 미발견, 귀소’—세 줄이면 끝나는 기록. 귀소 후 대기실에서 상급자는 오기택의 눈빛보다 ‘결재선’이 제대로 올라왔는지, 보고 포맷이 표준에 맞는지부터 확인한다. 이 지점에서 현장의 온도는 반복을 조직하는 또 다른 층위로 변한다. 출동과 귀소, 귀소와 대기, 대기와 재출동. 그 순환 속에서 진짜 사건의 결은 줄어들고, 행정의 형식이 두터워진다. 정해성이 한때 말했던 “기록되지 않은 온도가 가장 위험하다”는 경구가 불현듯 떠오른다. 이준상이라면 아마 그 온도를 ‘시간의 파동’으로, 백정현이라면 ‘감지되지 않은 화재’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오기택에게는 그것이 단순히 현장의 공기 밀도나 체감 온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의 연쇄, 사명감의 지속 여부, 그리고 동료들 사이의 온도차다. 도봉구조대 내부에는 이 온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감지하려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귀소 직후 휴대폰을 꺼내 SNS 스토리에 ‘오늘도 무사’라는 문장을 올린다. 어떤 이는 주말 투잡 일정을 확인하며, 어떤 이는 단순한 건수 쌓기에만 관심을 둔다. 오기택의 사명감과 이들의 즉물적 행태 사이에서, 출동과 귀소의 반복은 점차 조직의 리듬이 아니라, 무감각의 리듬으로 변질되어 간다. 그럼에도 그는 매 출동마다, 기록 외부의 온도를 다시 감지한다. 그 온도는 그의 몸에서 구토처럼 올라오지만, 그것이 바로 그가 여전히 현장에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귀소 직전, 그는 다시 무전기를 쥔다. “도봉구조대 귀소 완료.” 짧은 말 속에 방금 전까지의 모든 온도, 모든 반복, 모든 기록되지 않은 진동이 응축되어 있다. 이 반복이 끝나는 날, 그는 더 이상 소방관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날까지, 출동과 귀소 사이의 온도는 그를 부르고, 그는 응답한다. ## 2. 승강기 문 틈에서 들려온 구조요청이 방학동 골목의 시간을 재배열하는 날 방학동 골목은 늘 같은 구조로 시간을 쌓아올린다. 낮이면 전선줄 위로 비둘기가 줄지어 앉고, 저녁이면 분식집 환기구에서 튀김 냄새가 골목 끝까지 번진다. 오기택이 도봉구조대 차량에서 내려 장갑을 끼는 동안에도, 골목은 마치 구조대의 개입 따위는 예정에 없다는 듯 일상의 속도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날, 119 상황실에서 전송된 출동지령의 한 줄—“방학동 ○○아파트, 승강기 갇힘, 의식 미상”—이 이 시간의 결을 완전히 비틀어놓았다. 아파트 7층과 8층 사이, 멈춰버린 승강기 문 틈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금속 문짝의 냉기와 함께 전해지는 그 목소리는 공포와 희망이 뒤섞인 미묘한 진동을 품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그 짧은 호흡은 이 골목의 시간을 재배열한다. 방금 전까지 치킨 배달을 받던 거주자들은 복도를 기웃거리고, 관리인은 사고 접수를 처리하느라 로비를 분주히 오간다. 오기택은 문 틈으로 손전등 빛을 비추며 구조자의 위치를 확인한다. 어둠 속, 한 중년 남자의 눈이 빛을 향해 움찔한다. 그러나 현장의 긴박함을 느끼는 이는 모두가 아니다. 일부 동료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이거 오늘 건수로 올리면 조회수 꽤 나오겠는데.” 실적 보고용 사진, SNS 홍보용 영상이 우선순위를 잠식하는 순간, 승강기 안의 호흡은 데이터와 조회수 속에 묻혀간다. 오기택의 귀에는 사르트르 『구토』 속 한 구절처럼, 사물과 인간 사이의 이질감이 소음처럼 번진다. 문틈 너머의 손과 복도 끝에서 웃고 있는 동료의 표정이, 동일한 현실 속에서 전혀 다른 질감을 띠고 다가온다. 정해성이 현장에 있었다면, 그는 아마 “사진은 나중에 찍어도 된다”는 단호한 한마디로 공기를 바꿨을 것이다. 이준상은 그 목소리를 ‘시간을 깨뜨리는 호출’이라 명명했을지도 모른다. 백정현이라면 이후 보고서에서 ‘기록되지 않은 온도’로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현장에서, 오기택은 그저 무릎을 꿇고 문 틈 사이로 “곧 꺼내드리겠습니다”라는 짧은 약속을 전달한다. 장비가 도착하고, 유압기가 문을 벌리자 금속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갇혀 있던 시간이 터져 나온다. 승강기 안에서 흘러나온 그 한 사람의 숨결이 골목 전체의 리듬을 바꿔 놓는다. 출동 전의 방학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가 끝난 뒤에도, 그날의 골목은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오기택은 귀소 차량에서 그 골목을 다시 바라본다. 분식집 환기구의 냄새도, 전선 위의 비둘기도, 그날 이후로는 이전과 같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는다. 시간은 다시 배열되었고, 그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 3. 생활안전이라 불린 출동 속에 숨어 있는 도봉구 벌집 제거의 은밀한 전투 생활안전이라는 말은 서류 위에서만 보면 다정하다. 화재·구조·구급의 긴박한 호출과 달리, ‘생활안전’은 마치 사소하고 평온한 행정업무처럼 들린다. 붙임5 실적 내역 속 오기택의 출동 기록 중에도 “생활안전(벌집 제거)”라는 항목은 계절마다 수십 건씩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이 단어가 현장에서 함의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도봉구의 오래된 주택가, 방학동과 쌍문동 경계의 골목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벌집 제거 출동은, 그 자체로 작은 전쟁이었다. 그날, 무전기에는 “도봉구 ○○길, 주택 2층 처마 밑 대형 말벌집”이라는 지령이 찍혔다. 햇볕이 가장 따가운 시각, 골목 안쪽의 공기는 이미 낮 동안 달궈져 있었다. 오기택은 보호복을 점검하며 장비를 든다. 방화복보다 얇지만, 벌집 작업용 방호복은 움직임이 둔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현장에 도착하면 주민들은 이미 거리 두기를 하고 서 있다. 말벌의 날개 짓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귀에 닿는 저주파 진동은 사람을 압도한다. 처마 밑 검은 덩어리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구조물의 경계, 그 안엔 수백 마리의 침과 독이 숨 쉬고 있다. 문제는 이 출동이 단순히 벌집과의 전투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몇 동료는 장비를 트럭에 내려놓고도, 벌집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이건 생활안전이잖아, 네가 해.” 이런 말은 반쯤 농담, 반쯤은 책임 회피다. 더러는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내부 게시판에 올리려 하거나, 아예 뒤편에서 담배를 피운다. SNS에 “오늘도 벌집 완전 정복!”이라는 문구를 붙일 순간을 위해. 오기택은 그런 시선을 느끼면서도, 말벌집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구토』 속 주인공이 사물의 본질 없는 표면을 직시하며 느끼는 혐오처럼, 그는 이 장면 속에서 ‘생활안전’이라는 단어와 실제 현장 사이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인식한다. 벌집 제거는 화재진압과 달리 장비를 가동하는 순간부터 긴장감이 최고조로 오른다. 화재는 시각과 열로 다가오지만, 말벌의 위협은 보이지 않는 궤적으로 돌진한다. 살포기를 들고 접근하는 오기택의 전방에는 노란 줄무늬와 번들거리는 눈이 수십 쌍 그를 겨누고 있다. 보호복 너머로도 전해지는 진동, 날개가 옷감에 부딪히는 소리, 그 안에서 체온이 오르고 호흡이 빨라진다. 마침내 살포액이 벌집 표면을 덮고, 진동이 혼란으로 바뀌는 순간, 전투는 절정에 이른다. 작업이 끝나면, 주민들은 안도와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단 한 줄—“벌집 제거, 안전 조치 후 귀소.” 이 간단한 문장 뒤에는, 도봉구 주택가의 공기를 바꿔 놓은 은밀한 전투가 숨겨져 있다. 귀소 차량 안에서, 오기택은 방호복 안에 고인 땀과 날카로운 침 자국의 따가움을 느낀다.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상흔, 생활안전이라는 단어가 결코 포착하지 못하는 현장의 온도다. 그는 안다. 내일도 또 다른 ‘생활안전’ 호출이 올 것이고, 그 속에는 오늘과 같은 전투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또다시 뒤로 물러서거나, 사진만 찍거나, 건수만 쌓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오기택은 벌집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그 순간, 그는 생활안전을 ‘생활 위협으로부터의 최전선’으로 되돌려 놓는다. 기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결국 그가 반복해서 감수하는 이 은밀한 전투뿐이다. ## 4. 시건개방이라는 행정 용어에 갇힌 창동 고립자의 미발화된 마지막 한마디 창동의 오래된 다세대 건물 골목은 늦가을 비에 젖어 있었다. 상황실 무전에는 짧게, 그러나 냉정하게 발화된 문장이 찍혔다. “시건개방, 창동 ○○길, 고립자 있음.” 이 네 음절의 행정 용어 속에는, 누군가의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시간이 들어있지 않았다. 오기택은 차량에서 내리며 그 간극을 온몸으로 느낀다. 시건개방—잠긴 문을 연다는 뜻이지만, 현장에서는 종종 마지막 문을 여는 일과 같다. 3층, 칠이 벗겨진 철제문 앞에 서자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관리인이 건넨 예비키는 이미 맞지 않는다. 문은 무거운 침묵으로 잠겨 있었다. 오기택은 특수공구를 꺼내 걸쇠에 힘을 준다. 철판이 미세하게 울릴 때, 그 떨림이 안쪽까지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웃 몇 명이 계단참에 모여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그들의 시선 너머로 오기택은 ‘미발화’의 기운을 감지한다. 말이 되지 못하고 목구멍에 걸린 채 남아 있는 무언가—아직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목소리의 잔열. 문이 열리자, 희미한 냄새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흐른다. 작은 원룸 한가운데, 의자에 기대 앉은 노인이 눈을 뜨고 있었지만, 입술은 굳어 있었다. 그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아니, 청하려던 말이 이미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시몬 베유가 말한 “필요는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는 문장이 이 순간에 스며든다. 노인의 눈은 무언가를 건네려 했으나, 그 무엇도 발화되지 못한 채 방 안에 고여 있었다. 그 옆에서 동료 한 명이 무심하게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확인한다. “보고는 시건개방으로 올려?” 그의 말투는 완전히 사무적이다. 오기택은 대답 대신 노인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으킨다. 복도로 나서며 그는 방 안에 남겨진 공기를 뒤돌아본다. 거기에는 여전히 발화되지 못한 한마디가 부유하고 있다. 귀소 후 보고서에는 간결하게 적힌다. “시건개방, 고립자 안전 조치 후 귀가.” 그러나 그 문장은 현장의 결을 지우고, 마지막 한마디가 도달하지 못한 시간까지 삭제한다. 오기택은 그 공백을 지울 수 없음을 안다. 창동 골목의 늦가을 공기 속에서, 그는 그 한마디의 부재를 다시 들었다. 그것은 문이 열린 뒤에도 여전히 잠겨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깊은 문이었다. ## 5. 겨울밤 쌍문동 고드름 제거에서 낙하 위험과 행정 지연이 교차하는 경계 쌍문동의 겨울밤은 건물 외벽을 따라 얼어붙은 시간처럼 고드름을 매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얼음은 유리처럼 빛났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2층 창문 높이에서 떨어질 경우 치명적인 무게와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상황실 무전은 담담했다. “생활안전, 고드름 제거, 쌍문동 ○○길.”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오기택의 눈에는 이 호출이 단순한 생활 편의가 아니라, 한 사람의 머리 위에 매달린 비가시적 위협이었다. 그는 즉시 도로 한쪽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행정 절차가 먼저였다. 관할 구청의 안전관리팀과 연락이 닿아야 하고, 사다리차 투입 승인도 받아야 했다. 도봉소방서 내 보고라인에서는 “즉시 제거보다 절차 준수가 우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얼음 송곳들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오기택은 시간과 싸우는 감각을 느꼈다. 길 건너편에서 아이 손을 잡은 여성이 지나가려다, 그 위를 한참 올려다본다. 표정 속에는 ‘누군가 빨리 치워주겠지’라는 안도와 ‘혹시 지금 떨어지면’이라는 불안이 동시에 있었다. 오기택은 장비를 점검하며 지연되는 행정 절차에 초조함을 삼킨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행정은 때로 책임을 분산시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태를 만든다”는 문장이 이 공기 속에 스며드는 듯했다. 마침내 절차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 몇 분 사이, 바람이 한 번 더 강하게 불었고, 고드름 하나가 도로 위로 떨어져 깨졌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깨진 조각은 날카로운 경고처럼 빛났다. 오기택은 곧바로 사다리차를 세우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손에 닿는 얼음은 놀랄 만큼 무겁고 차가웠다. 깨지는 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작업을 마치고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그는 승인 대기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반복되던 ‘만약’의 시나리오를 지울 수 없었다. 귀소 후 보고서에는 간단히 적혔다. “고드름 제거, 안전 조치 완료.” 그러나 그 안에는 겨울밤의 바람과 절차 지연 사이에서 서 있던 경계의 긴장, 그리고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위험과 맞선 손끝의 기억이 빠져 있었다. 오기택은 그 빠진 조각을 마음속에 넣어 둔 채, 다음 호출을 기다렸다. ## 6. 화재연기보다 먼저 도착한 구조자의 호흡이 도봉소방서 진입선을 재구성하는 순간 새벽 공기는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도봉소방서 차고의 문이 열리자 엔진의 울림이 그 공기를 갈라냈다. 무전기에는 “도봉구 ○○동, 다세대주택 화재 의심”이라는 간략한 지령만이 남았다. 화재 연기를 본 시민의 신고였지만, 현장 사진이나 영상은 없었다. 불이 보이지 않는 호출, 그러나 오기택은 그 빈 문장 속에서도 이미 몸을 기울였다. 차량이 골목 초입에 진입하자, 아직 연기는 없다. 대신, 특유의 건물 속 공기 변화—겨울임에도 이상하게 무거운 열감이 문틈과 배기구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차문이 열리기도 전에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가 아닌, 공기 자체의 결이 변해 있었다. 그 호흡이 경계선을 다시 그었다. 표준 매뉴얼의 안전거리보다 더 안쪽으로, 보고 절차보다 더 앞서서, 진입선이 그의 폐 속에서 먼저 재편됐다. 동료 몇 명은 연기가 없다는 이유로 “혹시 오신김에 확인만 하고 귀소하지?”라는 농담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장비를 메고 있었다. 위험을 시각으로만 판단하는 이들과 달리, 오기택은 체온과 호흡의 변화를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건물 외벽을 훑으며 창문마다 손전등을 비추고, 출입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미묘한 열이 손바닥에 전해진다. 문이 열리자, 희미한 연기층이 안쪽 천장에 얇게 깔려 있었다. 불씨는 2층 부엌 가스레인지 근처에서 막 살아나고 있었다. 몇 분만 늦었다면 환기와 산소 공급이 맞물리며 화세가 급격히 번졌을 것이다. 그는 곧바로 소화기를 집어 불씨를 눌렀다. 다른 대원들이 물줄기를 연결하는 사이, 부엌 안에서 불이 완전히 꺼졌다. 작업 후, 보고라인에서는 “연기 진입 전 초기 진압 성공”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그러나 보고서 어디에도 ‘구조자의 호흡이 진입선을 바꿨다’는 문장은 없었다. 오기택은 그 차이를 잘 안다. 그것은 절차로 측정되지 않는 감각이며, 매뉴얼에 기입되지 않는 선이다. 그 선을 넘어선 건 그의 몸이었고, 그 순간 도봉소방서의 진입선은 책 속이 아니라 현장에서 다시 쓰였다. 귀소하는 차량 안, 그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는 연기 대신 겨울 새벽의 찬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방금 전, 보이지 않는 위험을 먼저 알아챈 순간의 공기와 온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 7. 차량 화재 진압에서 금속의 비명과 SNS 셀카가 동시에 발화하는 도로변 한낮의 도로 위, 교차로 한복판에서 연기가 낮게 깔려 있었다. 붙임5 실적 내역 속 ‘차량화재’ 항목이 또 하나 늘어날 날이었다. 무전에는 “○○로 사거리, 승용차 화재”라는 짧은 문장만 남았다. 그러나 오기택이 현장에 다다르자, 눈앞의 광경은 보고서의 간결함과는 달랐다. 검은 세단의 보닛은 이미 벌어진 채 금속이 타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엔진룸 안쪽에서는 날카로운 ‘삐걱’거림이 연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금속이 스스로를 찢는 비명 같은 소리였다. 그는 곧바로 호스를 연결하고, 엔진룸 쪽으로 물줄기를 조준했다. 고열에 달궈진 금속이 물을 맞으며 터트리는 소리가 귀에 박힌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매캐한 냄새가 얼굴을 덮친다. 불길을 누르는 동작은 반복적이지만, 그 반복 속에는 언제나 다른 변수들이 숨어 있다—연료 잔량, 바람 세기, 차량 하부의 불씨 위치. 그러나 진압선 뒤편,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부 대원은 안전선 너머로 물러서, 휴대폰을 꺼내 불길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있었다. “이건 조회수 잘 나오겠다.”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도로변에는 행인들도 휴대폰을 들어 불타는 차를 촬영하고, 누군가는 SNS 생중계를 켜고 있었다. 오기택의 귀에는 여전히 금속이 터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리가 이들에겐 단지 ‘좋아요’를 부르는 배경음에 불과한 듯했다. 정해성이 있었다면 이런 장면을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번도 ‘기록용’ 사진보다 화재 진압이 늦춰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백정현이라면 나중에 보고서 주석에 “현장 집중 저해 요소 발생”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오기택은 그저 물줄기를 놓지 않았다. 불이 완전히 꺼지기 전까지, 시선과 목적이 다른 이들과 같은 현장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 그의 자리였다. 불이 잡히고, 엔진룸에서 마지막 김이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장비를 내려놓지 않았다. 귀소 후 보고서에는 “차량 화재 진압, 인명피해 없음”이라는 간단한 문장이 남았다. 하지만 그날의 도로변에는 금속의 비명과 셀카 셔터음이 동시에 울렸고, 오기택은 그 부조화 속에서도 불길을 잡았다. 그 온도와 소리는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발화하고 있었다. ## 8. 자살 우려 출동이 구조와 관료제 보고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창동 새벽 새벽 3시 42분, 창동 ○○아파트. 상황실 무전은 단 한 줄이었다. “자살 우려, 고층 베란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응답은 없었지만, 15층 위쪽에서 가느다란 그림자가 베란다 난간에 걸쳐 있었다. 겨울 바람이 건물 외벽을 타고 불어오고, 아래쪽엔 이미 경찰과 몇 명의 주민이 서 있었다. 오기택은 곧장 장비를 내려놓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숨이 차오를수록, 발걸음은 빨라졌다. 15층 복도 끝, 열린 베란다 문 너머에서 그는 그 사람의 어깨선을 보았다. “이쪽을 보세요.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목소리를 낮추고, 몸의 무게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두었다. 거리와 각도를 재며 조금씩 다가가는 동안, 무전기에서는 상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장 상황 보고하세요. 사진 있습니까?” 절차상 보고와 증빙 촬영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카메라를 꺼내는 건 치명적인 틈이 될 수 있었다. 바람이 불고, 발끝이 난간 밖으로 밀려나려는 찰나, 그는 한 손을 뻗었다. 손목을 붙잡는 순간, 그 차가운 피부 온도가 모든 행정 절차보다 우선이었다. 몸을 복도로 끌어들이며, 뒤에서 다른 대원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숨을 몰아쉬는 고립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구조자의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그러나 구조 직후, 관할 보고라인에서는 다시 물었다. “사진은요? 현장 상황 기록은요?” 마치 구조의 가치는 문서와 이미지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듯. 오기택은 짧게 답했다. “기록은 없습니다. 대신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그 대답이 보고서에 어떻게 적힐지는 알 수 없었다. 귀소 후 붙임5 실적 내역에 새로 찍힌 한 줄—“자살 우려 출동, 안전 조치 후 귀가”—그 안에는 창동 새벽의 바람, 난간 위의 떨림, 그리고 구조와 보고 사이에서 미끄러질 뻔한 한 생명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빠진 부분을, 오기택은 자기 손의 기억으로 채워 넣고 있었다. ## 9. 산악사고에서 발끝의 기울기가 인명구조팀과 화재진압대의 긴장선을 그리는 순간 도봉산 자락, 바람이 세차게 부는 늦가을 오후. 상황실 무전은 짧고 건조했다. “도봉산 ○○능선, 추락 부상자 발생. 인명구조 요청.” 붙임5 실적 내역 속 수많은 산악사고 기록 중 하나처럼 보이지만, 오기택은 이런 호출이 결코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산악 지형의 고유한 위험, 그리고 현장에 동시에 투입되는 인명구조팀과 화재진압대 사이의 미묘한 긴장까지—모두가 함께 엮이는 복합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비를 메고 등산로를 오르는 발걸음은 점점 좁아지고 미끄러워졌다. 돌계단이 끊긴 곳에서 흙과 낙엽 위로 부서진 나뭇가지들이 발끝을 흔들었다. 이 구간에서의 기울기는 단순한 지형 문제가 아니라, 구조자의 몸 전체를 기울이는 의사결정의 각도였다. 발끝을 얼마나 세우느냐에 따라, 혹은 무게를 어떻게 분산하느냐에 따라, 현장 도착 속도와 안정성이 달라진다. 능선 중간 지점, 인명구조팀이 먼저 도착해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바로 아래쪽, 화재진압대가 장비를 끌어올리며 대기선에 섰다. 산악사고에서 이 두 부서는 같은 목표를 향하지만, 그 접근 방식과 우선순위에서 묘하게 어긋난다. 인명구조팀은 즉시 접근을 선호했고, 화재진압대는 장비와 안전선 확보를 먼저 요구했다. 그 사이에 부상자의 신음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오르막 끝에서 발끝의 각도를 조금 더 세운 건 오기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중을 완전히 앞쪽으로 실어, 바위를 붙잡고 한 발 한 발 부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화재진압대 대원이 “안전선 아직…”이라고 말하는 순간, 부상자가 기울어진 채 더 아래쪽으로 미끄러질 듯 몸을 떨었다. 그 순간의 기울기는 단순한 발의 기울기가 아니라, 현장의 긴장선을 가르는 경계였다. 손이 부상자의 어깨에 닿고, 다른 손이 절벽 옆 바위에 닿았다. 무게중심이 다시 뒤로 이동하는 동안, 화재진압대가 안전선을 연결했고, 인명구조팀이 들것을 준비했다. 이 짧은 교차는, 서로 다른 부서의 긴장과 협력이 얽혀 만들어낸 현장의 리듬이었다. 부상자가 안전하게 능선 아래로 이송되자, 보고서에는 “산악사고, 인명구조 및 안전 조치 완료”라는 단일 문장이 적혔다. 그러나 그 문장 속에는 발끝 하나의 기울기가 만든 미세한 균형, 그리고 그 순간에 그려진 두 팀의 긴장선이 빠져 있었다. 오기택은 그 긴장선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산 위에서만 보이고, 산을 내려오면 사라지는 선이었다. ## 10. 생활안전 출동의 반복이 도봉구 구조대 내부의 사익 추구와 정체를 드러내는 주기 붙임5 소방활동 실적 내역을 들여다보면, 도봉구 구조대의 하루는 끝없는 생활안전 출동으로 점점 채워져 간다. 벌집 제거, 시건개방, 반지 절단, 동물 포획—사건의 난이도와 위험도는 제각각이지만, 호출의 빈도는 계절과 무관하게 꾸준하다. 오기택에게 이 반복은 시민 생활의 틈새를 지키는 순환이지만, 일부에게는 다른 의미로 굳어져 있었다. 생활안전은 화재진압이나 대형 구조보다 언론 노출도 적고, 긴장감이 덜하다는 이유로 ‘편한 건수’ 취급을 받기도 한다. 몇몇 대원은 출동을 업무라기보다 근무 시간 채우기, 혹은 개인 일정과 병행하는 틈으로 인식했다. 오전 출동이 끝나면 곧장 사복으로 갈아입고 투잡 현장으로 향하는 이도 있었고, 안전 조치 완료 후 곧장 차량 안에서 SNS를 열어 자신의 ‘활동 일기’를 올리는 이도 있었다. 사진 속에는 시민의 얼굴이 흐릿하게 모자이크 처리됐지만, 본인 얼굴은 필터까지 씌워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 주기는 눈에 보이지 않게 내부 문화를 변형시켰다. 출동이 많을수록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야 하지만, 오히려 반복 속에서 숙련보다 회피와 형식화가 자리잡았다. 간단한 작업은 늘 같은 사람이 맡고, 위험도가 있는 작업은 회의적인 표정과 함께 미뤄졌다. 오기택이 벌집 제거 현장에서 땀과 침을 삼키며 사다리 위에 있을 때, 누군가는 차량에서 “끝나면 연락해”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정해성은 과거 이런 문화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는 생활안전을 ‘생활 위협 제거’라 정의했고, 출동을 단 한 번도 가볍게 여긴 적이 없었다. 백정현은 반복 기록 속에 숨은 공백을 찾아내 보고서에 주석을 달곤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점점 소수의 것이 되었고, 조직의 다수는 ‘문제 없이 귀소’라는 말로 하루를 닫았다. 오후가 되면 또다시 호출음이 울린다. 같은 골목, 같은 이유, 같은 절차. 오기택은 그 반복 속에서 시민의 얼굴과 위협의 형태가 매번 다르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 옆에서 같은 반복을 경험하는 동료의 눈빛 속에는 더 이상 그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생활안전 출동의 주기는 현장의 사익 추구와 무기력함을 함께 드러내며, 도봉구 구조대의 내부 시계를 조금씩 굳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 11. 출동 건수의 통계곡선에 드러나지 않는 소방청 보고라인의 권력 사유화 구조 붙임5 소방활동 실적 내역 속 출동 건수는 그래프처럼 매끄럽다. 월별 곡선은 계절에 따라 완만하게 오르고 내리고, 유형별 비중은 비슷한 비율을 유지한다. 이 통계곡선은 마치 조직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듯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오기택은 그 곡선의 아래, 보고라인의 심층에 숨은 또 다른 구조를 오래 전부터 목격해왔다. 소방청과 시·구 본부로 이어지는 보고 체계는 단순한 행정 절차를 넘어, 누가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어떤 사건을 삭제하거나 축소하는지에 따라 권력이 이동하는 장이 된다. 특정 부서의 성과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 출동은 빠르게 상신되고, 반대로 난처한 사건이나 문제의 여지가 있는 출동은 ‘내부 검토’라는 이름으로 묻힌다. 보고서 작성 권한을 쥔 사람의 손끝에서, 통계곡선은 얼마든지 재구성된다. 현장에서는 이를 ‘위로 올릴 만한 건’과 ‘그냥 묻을 건’으로 구분하는 은어가 돌았다. 어떤 상급자는 인명 구조보다 ‘그날의 건수’가 우선이었고, 때로는 사진 한 장이 사건의 경중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기도 했다. 숫자는 그저 행(row)으로 보이지만, 그 행의 선택권이 곧 보고라인 내부에서의 영향력과 맞물린다. 보고라인 상단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곡선의 모양을 원하는 대로 다듬을 수 있었다. 오기택이 속한 도봉구조대의 하루 출동이 아무리 고되고 위험했어도, 보고 단계에서 그 가치가 휘발되는 경우가 있었다. 초기 진입과 위험 감수는 현장에서 이뤄졌지만, 최종 보고에는 ‘인명 피해 없음,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여섯 단어로 축약됐다. 반대로 경미한 사건이더라도 보고라인이 선호하는 형식과 사진, 문구를 갖추면 조직 내부 홍보자료로 승격됐다. 정해성은 과거 이런 흐름을 ‘권력의 사유화’라 불렀다. 숫자와 문서의 외형이 권력자의 의도에 맞게 꾸며지고, 현장의 결은 삭제되는 구조. 백정현은 이를 ‘기록되지 않은 화재’의 행정판이라 했다. 오기택은 이 권력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이 목격한 현장의 온도를 기억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통계곡선 위의 매끈함이 유지되는 한, 보고라인의 권력 사유화 구조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곡선은 매달 소방청의 서버에 저장된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거의 아무도 그 곡선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는 보지 않는다. 오기택에게 그 그래프는 성과표가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손과 온도의 무덤이었다. ## 12. 고위험 대응과 일상 대응이 한 주간의 리듬 안에서 SNS·투잡 군상을 변조시키는 방식 도봉구조대의 한 주는 늘 불균형한 리듬 위에 놓여 있었다. 월요일 새벽, 창동 재개발 구역의 다세대 화재처럼 모든 감각이 곤두서는 고위험 대응이 있을 때, 대원들의 몸은 본능적으로 날카로워졌다. 숨이 가빠지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위험 구역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우면서도 결단력이 실렸다. 오기택은 이 강도 높은 출동에서 동료들과 호흡이 맞아떨어질 때의 기묘한 집중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오전, 일상 대응으로 분류되는 생활안전 출동이 반복되면, 그 긴장감은 빠르게 풀렸다. 벌집 제거, 반지 절단, 시건개방. 현장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시민에게는 절박한 호출이지만, 일부 대원들에게는 ‘쉬운 건수’이자 개인 시간을 관리할 여유로 변모했다. 이때부터 조직 안의 온도차가 뚜렷해졌다. 몇몇은 전날의 화재 사진을 골라 SNS에 업로드했다. “위험과 맞서는 우리”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필터로 보정된 얼굴과 장비 사진이 올라왔다. 그 뒤로는 생활안전 출동 중 찍은 셀카와 커피 사진이 이어졌다. 다른 일부는 출동 간격을 이용해 투잡 현장으로 향했다. 배달 가방을 메거나, 건설 현장의 일용직 조끼로 갈아입는 모습은 더 이상 드물지 않았다. 오기택은 이런 변화를 ‘한 주간의 리듬 변조’로 느꼈다. 고위험 대응에서 공유했던 생사의 긴박함은, 며칠 뒤 일상 대응 속에서 점점 사라졌다. 대신 SNS 피드와 부수입 일정이 각자의 우선순위를 재편했다. 동료들 중 누구는 팔로워 수를, 누구는 주말까지의 수입 목표를 이야기했다. 정해성은 이런 풍경을 불편해했다. 그는 “위험은 순간이고, 사명은 지속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점점 소수의 목소리가 되었고, 조직 내 대다수는 고위험과 일상을 오가며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갔다. 그 리듬 속에서, 위험의 의미와 사명의 무게는 매번 조금씩 변조됐다. 붙임5 실적 내역에는 그저 ‘출동 건수’와 ‘유형’만 남았다. 그러나 오기택은 알고 있었다. 같은 주, 같은 출동 횟수 안에 전혀 다른 태도와 우선순위가 섞여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조된 리듬이 쌓일수록, 조직이 공유하는 호흡은 서서히 흐트러져 간다는 것을. ## 13. 특별승진 공적 서술 뒤편에 숨은 오기택과 이준상의 삭제된 실패와 공로의 공명 붙임3 ‘특별승진 추천자 공적조서’를 펼치면, 문장 하나하나가 정제된 잉크처럼 매끈하게 흘러간다. “○○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선도 진입하여 인명 ○명 구조.” “창동 ○○산악사고 현장에서 팀을 지휘하여 부상자 ○명 안전 이송.” 문장은 간결하고, 사건의 시작과 끝이 확실하며, 모든 서술은 성공으로 종결된다. 표면만 보면, 이 서류는 오기택이 지나온 길을 완전무결한 직선으로 그려놓은 것 같다. 그러나 그 직선 뒤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혹은 보려 하지 않는 굴곡이 촘촘히 숨어 있다. 그 굴곡 속에는 구조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위험 구역 안까지 갔지만 단 몇 미터 차이로 손이 닿지 않았던 순간, 도착은 했으나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던 현장, 그리고 절차와 행정 지연 속에 시간을 잃어버린 결정적인 순간들. 오기택은 그것들을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어느 날 새벽, 방화문을 열고 들어간 거실에서 바닥을 가득 메운 연기와 싸우며 한 명을 안아 나왔지만, 방 안에 있던 다른 한 명을 끝내 꺼내오지 못했던 장면. 보고서에는 “인명 1명 구조”라고만 남았다. 실패의 경위, 그 한 명을 향한 마지막 시도, 그 후의 공허한 호흡은 어디에도 기입되지 않았다. 이준상은 그런 보고서의 행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기택에게 종종 말했다. “공적은 완결된 문장을 원하지. 그러나 현장은 늘 미완의 문장으로 끝난다.” 이준상 자신도 중앙 구조본부에서 활동하던 시절, 수많은 공적 서류를 봐왔다. 그 문서들 속에는 ‘성공’이라는 단어만 있었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장비 결함, 인원 부족, 판단의 고독은 철저히 지워져 있었다. 실패는 기록되지 않았고, 구조 중에 쌓아 올린 값비싼 경험과 몸의 기억조차 ‘공적’이라는 이름 아래 표백됐다. 오기택은 그 말의 의미를 체감했다. 특별승진을 위해 작성되는 공적 서술은, 한 사람의 경력을 반짝이는 궤적으로 편집하는 동시에, 그 궤도에서 벗어난 어둠을 철저히 차단한다. 보고라인 상단에서 필터링된 사건들은 ‘승진 가치’가 높은 것과 낮은 것으로 분류되고, 가치가 낮다고 판단된 순간, 그 현장은 공식 기록에서 사실상 소멸한다. 남는 건 미려한 어휘와 숫자, 그리고 보고서가 요구하는 형식뿐이다. 하지만 오기택에게 그 어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실패의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감지했던 공기와 온도를 기억한다. 불길의 색이 바뀌는 시점, 무너지는 구조물의 떨림, 무전기의 잡음 속에서 간신히 들려오던 구조 요청의 끝자락. 그 모든 것이 공적조서에서는 삭제되지만, 오기택의 몸과 호흡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준상은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남기는 건 보고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의 호흡과 죽은 사람의 침묵이야. 보고서가 사라져도, 그건 남는다.” 그 말은 오기택의 귀에 오래 남았다. 그는 자신이 겪은 실패와 공로가, 숫자로도, 수상 경력으로도 치환될 수 없는 결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상이 지적한 대로, 그것들은 공식 문서 바깥에서 서로의 몸에 각인된 채 공명하고 있었다. 특별승진은 분명 한 사람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장면이 잘려나가고 덮이는지, 오기택은 누구보다 잘 안다. 공적조서는 빛나는 순간만을 묶어두지만, 진짜 현장은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그 그림자를 함께 기억해주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그것이 오기택에게는 어떤 표창보다도 더 큰 의미였다. 그래서 그는 공적 서류를 넘기면서도, 거기에 없는 이야기들을 마음속에서 다시 썼다. 쓰이지 않은 문장들, 실패를 인정하고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곁에 있었던 이들의 숨소리까지. 그것이야말로, 오기택이 진짜로 품고 있는 공적이었다. ## 14. 증빙자료 속 한 장의 사진이 이준상·백정현의 기억을 호출하는 화재 현장 붙임4 ‘증빙자료’ 뒷부분에는 여러 장의 현장 사진이 무심하게 배열돼 있다. 대형 화재 현장의 전경, 불길 속에서 반쯤 녹아내린 구조장비, 그리고 인명 구조 직후의 어수선한 건물 내부. 그중에서도 오기택의 눈길이 오래 머무는 건 단 한 장이었다. 먼지가 자욱한 계단참, 바닥에 흩어진 소화기 잔해, 그리고 사진 속 중앙에 흐릿하게 찍힌 한 쌍의 장갑. 그 장갑은 불길과 연기 속에서 온몸을 기울여 문을 열던 바로 그 순간, 그의 손에 씌워져 있던 것이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이 이준상의 기억을 불러냈다. 그는 중앙 구조본부 시절, 비슷한 계단 구조와 유사한 화재 양상을 가진 사건을 경험했다. 당시 그는 통신 두절과 장비 결함이 겹친 상황에서 홀로 상층부 진입을 결심했고, 그 결정이 몇 명의 생사를 갈랐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장비 문제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신속한 진입으로 인명 구조”라는 문장만 남았다. 사진 속 계단참의 매캐한 질감과 그 장갑의 위치가, 그에게 당시의 공기와 심박수를 그대로 되살려주었다. 백정현 역시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엔 ‘기록되지 않은 화재’의 장면이 겹쳐졌다. 정식 출동 기록은 있었지만, 통계에서는 누락된 사건. 그는 도착했을 때 이미 불길이 잦아든 상태였으나, 건물 내부는 여전히 고온의 잔열과 유독가스로 가득했다. 보고서에는 “화재 진압 완료”만 남았지만, 그 공간에서 느꼈던 숨막히는 열기와 구조되지 못한 목소리는 사진 속 계단의 어둠과 닮아 있었다. 오기택에게 이 사진은 단순한 증빙자료가 아니었다. 보고서나 통계표가 포착하지 못한 현장의 결, 그 현장을 함께 느꼈던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기호였다. 그 장갑은 손에 닿는 질감, 무게, 연기 냄새까지 기억 속에서 되살렸다. 사진 한 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세 사람—오기택, 이준상, 백정현—이 각자의 자리에서 겪었던 위험과 공포, 그리고 기록 바깥에 남겨진 감각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서류철 속에 묻혀 있던 그 한 장은, 시간이 흘러도 현장을 부르는 신호처럼 작동했다. 보고서로는 전달되지 않는 진짜 이야기,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아는 결속, 그리고 지워진 기록 너머에 여전히 살아 있는 온도. 그것이 바로, 그 사진이 세 사람의 기억을 동시에 호출한 이유였다. ## 15. 현장대응단 시절 연속 화재 대응이 조직의 무능과 개인의 소명을 교차시키는 구조 현장대응단에 있던 시절, 오기택의 한 주는 거의 모든 날이 화재로 시작해 화재로 끝났다. 대형 상가 화재, 재개발 구역의 연쇄 방화, 산업단지 내 창고 폭발까지—붙임5 실적 내역 속에는 하루 간격으로 찍힌 ‘화재’ 기록들이 촘촘했다. 그는 그 기록 하나하나가 ‘출동–진입–진압–복귀’라는 단순한 순서로 끝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각 건마다 위험은 다르고, 판단은 즉각적이어야 했으며, 체력과 집중은 한계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그러나 같은 팀 안에서도 이 반복을 대하는 태도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몇몇 대원은 연속 화재를 ‘현장 경험을 쌓을 기회’라 여기며 사명감을 유지했지만, 다른 이들은 연속 출동이 주는 피로를 핑계로 위험 구역 진입을 회피했다. 출동 직전까지 차 안에서 하품하며 “이번 건도 외곽 지원으로 돌리지 뭐”라고 말하는 자, 화재 진입은 뒤로 미루고 외곽에서 장비만 옮기다 시간을 보내는 자, 불길이 가장 거센 시간에는 슬그머니 사라져 사진 찍을 각도를 잡는 자—오기택의 눈에는 그들이 모두 천박하게 보였다. 더 악질적인 것은 보고라인을 차지한 상급자들이었다. 현장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신속한 초기 대응’이라는 문장을 미리 입력해 두거나, 언론 노출 가능성이 높은 화재에는 앞다퉈 현장에 나타나 표정 관리에만 몰두했다. 반면 언론과 무관한, 그러나 훨씬 위험한 골목 화재나 비공식 진입 건은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오기택이 불길 속에서 견뎌낸 시간과 위험은, 보고서에서는 ‘피해 경미’라는 네 글자로 대체됐다. 그는 이 구조가 단순한 태만이 아니라, 조직의 무능이 제도화된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화재 대응의 본질은 위험을 줄이고 생명을 구하는 것인데, 일부 대원과 관리자들은 이를 ‘자신의 평판 관리’와 ‘편한 근무’로 치환했다. 연속 화재 대응이 이어질수록, 사명감 있는 사람은 더 고되고, 기회주의자는 더 편해졌다. 오기택은 이런 상황을 견디며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속도로 타락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다짐 속에는 깊은 냉소가 섞여 있었다. 불길 속에서 같이 뛰어야 할 사람들이, 같은 제복을 입고도 전혀 다른 목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분노를 키웠다. 그는 연속 화재 속에서도 자신이 한 일을 숨기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 현장에서 사라진 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현장대응단 시절 그가 배운 가장 쓰디쓴 교훈이었다. ## 16. 인명구조와 화재진압 사이에서 변위되는 ‘우선순위’라는 판단의 좌표 창동의 한 노후 주택가에서 화재 신고가 접수된 날, 무전기에는 짧은 문장만 남았다. “화재 발생, 2층 주택, 인명 고립 가능성 있음.” 오기택은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명확한 판단의 좌표가 그려졌다. ‘인명구조’가 최우선이다. 불길이 번지기 전에 사람을 꺼내야 한다. 화재진압은 그 다음 순서였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자, 상부에서 파견 나온 지휘자는 다른 좌표를 들이밀었다. “진입 전 화점부터 제압하라.” 그 지시대로라면, 고립자의 구조는 수 분 이상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기택은 무전으로 재차 보고했다. “2층 창문에 생존자 확인, 즉시 구조 진입 필요.” 그러나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우선 화점 제압, 안전 확보 후 구조.” 그 순간, 그의 좌표는 강제로 변위됐다. 현장의 판단이 행정 절차 속에서 수정되고, 구조자의 우선순위는 화재진압이라는 ‘보고서 친화적’ 선택지로 대체됐다. 이날 이후, 오기택의 이름은 보고라인 상부에서 자주 거론되기 시작했다. 현장 판단을 고집하고, 지시보다 인명 구조를 앞세운 ‘문제 있는 대원’이라는 낙인이 붙었다. 불길 속에서 사람을 먼저 꺼내오는 일이, 관료제의 언어로는 ‘절차 위반’이었다. 몇 달 뒤, 그는 원치 않는 발령장을 받았다. 다른 센터로의 전보, 이유는 ‘업무 재배치’.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 이동이 아니라, 현장 감각과 사명감을 꺾으려는 관료제 집단의 조치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은 보호받지 못했고, 보고서에 적합한 순서에 맞추지 않는 자는 자리에서 밀려났다. 발령 전 마지막 근무일, 그는 여전히 사람을 먼저 꺼냈다. 그 순간에도 행정은 그를 기록에서 지웠다. 붙임5 실적 내역에는 단지 “화재진압 및 안전조치”라는 평범한 문장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 문장 뒤편에는, 사람을 살리는 좌표와 보고서를 완성하는 좌표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탄압당한 한 구조자의 초상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 17. 생활안전 출동의 반복이 만들어낸 구조자 신체 기억과 혐오의 재배선 붙임5 실적 내역을 펼치면 생활안전 출동 항목이 계절과 주기를 가리지 않고 끝없이 이어진다. 벌집 제거, 시건개방, 반지 절단, 동물 포획. 시민에게는 시급하고 절박한 호출이지만, 오기택에게 이 반복은 단순한 업무 목록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 일종의 지도였다. 손끝은 벌집의 진동을 기억했고, 어깨 근육은 시건개방 시 걸쇠를 밀어올리는 각도를 기억했다. 무릎 관절은 반지 절단 작업 때 구부린 각도를 알고 있었고, 코끝은 오래된 아파트 복도에 스민 곰팡이 냄새와 구조 요청자의 땀 냄새를 구분했다. 하지만 이 신체 기억은 단순한 숙련의 축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서히 혐오의 재배선과 맞닿았다. 처음에는 반복 덕에 효율이 높아졌지만, 점점 조직 내부의 무기력과 무관심이 그 효율을 갉아먹었다. 위험도가 낮다고 판단된 출동에는 책임감 없이 대충 처리하려는 태도가 퍼졌고, 일부는 생활안전을 ‘쉬운 건수’로 여겨 기피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출동 현장에서 시민 대신 휴대폰 카메라를 먼저 꺼냈고, 누군가는 “이 정도는 내일 해도 된다”는 말로 지연을 정당화했다. 오기택은 이런 장면들을 거듭 목격하면서,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동작과 감정의 경로가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한때는 무의식적으로 안전벨트를 채우고, 장비를 쥐고, 현장에 달려들던 근육이, 이제는 그 옆에서 무심하게 웃는 동료들의 표정과 겹쳐 떠올랐다. 그 웃음 속에는 책임 대신 편의가, 공공성 대신 사익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체가 기억하는 기술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기술을 반복하게 만드는 조직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변화가 오기택의 몸 안에서 미묘한 혐오의 경계를 다시 그렸다. 과거에는 현장의 위협과 시민의 불안을 향했던 경계선이, 이제는 같은 제복을 입고 옆에 선 채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뻗어갔다. 보고서에는 여전히 “생활안전 출동, 안전조치 후 귀소”라는 건조한 문장만 남는다. 그러나 오기택의 몸은 그 건조함 속에서 수천 번 반복된 동작의 무게와, 그 동작 옆에서 서서히 자라난 혐오의 재배선을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 18. 도봉구 구조대라는 공간적 배치가 사건 패턴과 대응 감각을 변형시키는 힘 도봉구 구조대는 행정구역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북쪽으로는 산악 지형이, 남쪽으로는 노후 주택가와 상가 밀집지가, 서쪽으로는 왕복 8차선의 교통 요충지가 이어졌다. 이 지리적 특성은 구조대의 출동 패턴을 다른 어떤 관할보다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오전에는 도로 한복판의 다중 추돌 사고에 출동했다가, 점심 무렵엔 아파트 승강기 갇힘 구조로, 저녁에는 산악 실종자 수색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루에도 도시와 산, 도로와 건물 내부를 넘나드는 대응은 구조자의 감각을 끊임없이 재조정하게 했다. 산악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발목이 아직 흙냄새를 품고 있을 때, 곧바로 화재진압 장비를 착용하고 좁은 주택 골목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이때 필요한 감각의 전환은 단순히 장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몸과 시야, 심지어 호흡 패턴까지 바꾸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런 특수한 배치가 팀원마다 다른 방향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일부는 이 복잡성을 훈련의 기회로 삼아 어떤 현장에도 신속하게 적응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이 예측 불가능성을 ‘회피의 구실’로 사용했다. “이 구역은 우리가 맡는 게 맞나?” “이건 산악팀 소관이지 않나?” 책임을 떠넘기는 순간, 공간적 배치는 역설적으로 대응 속도를 늦추는 원인이 됐다. 이 패턴 속에서 오기택은 자신의 대응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사건의 유형을 넘어서, 공간이 주는 함정을 먼저 읽어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옆에서 이를 의도적으로 무디게 만드는 사람들도 봤다. 위치와 지형을 핑계 삼아 진입을 미루고, 사건을 관할 경계 밖으로 밀어내려는 태도. 그 순간 도봉구 구조대라는 공간은 훈련장이 아니라 변명 제조소가 되었다. 결국 이 배치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눴다. 공간이 주는 변수를 감각적으로 흡수해 더 빠르게 대응하는 사람, 그리고 그 변수를 방패로 삼아 움직이지 않는 사람. 오기택은 그 둘이 같은 지도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현장의 어떤 위험보다도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 19. 모든 실적표의 마지막 행 아래 존재하는, 기록되지 않은 한 번의 미도착 한 달이 끝나면 실적표가 작성된다. 날짜, 시간, 출동 유형, 조치 결과가 반듯하게 정렬된 표. 한 칸 한 칸은 숫자와 단어로 완결된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기택은 알고 있다. 그 마지막 행 아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여백에 또 하나의 사건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 날도 호출은 똑같이 울렸다. 창동의 오래된 주택가, 전기 합선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 차량이 골목에 진입하려는 순간, 한 블록 앞에서 도로가 완전히 막혔다. 불법 주차된 차량, 좁은 골목, 뒤엉킨 배달 오토바이들. 무전으로 우회 경로를 확인했지만, 그 몇 분의 지연이 현장 도착 시간을 갈라놓았다. 도착했을 때, 이미 주민들이 자력으로 불을 껐다. 집 안은 그을음 냄새와 함께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안도감이 아니라 씁쓸함으로 가득했다. 한 노인은 현관 앞에서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가 오기택의 귓속에 오래 남았다. 귀소 후 실적표에는 이 출동이 없었다. 보고라인에서는 “화재 아님”으로 분류됐다. 실제 불이 번지지 않았으니 기록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오기택의 기억 속에서는 이건 분명히 ‘한 번의 미도착’이었다. 그 지연의 무게, 현장에서 마주한 눈빛,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손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감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미도착은 숫자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구조자의 마음에 가장 깊은 흉터로 남는다. 모든 실적표의 마지막 행 아래, 누구도 보지 않는 빈 공간에는 그렇게 한 번씩, 실패한 발걸음이 놓여 있다. 오기택에게 그 여백은 실패의 증거이자, 다음 번에는 반드시 채워야 할 자리였다. ## 20. 실적 내역이 말하지 않는, 기록 외부의 사명감과 구토의 진동 월말이면 구조대 사무실 책상 위로 동일한 형식의 표가 차곡차곡 쌓인다. 날짜, 시간, 출동 유형, 조치 결과. 표 안의 단어들은 놀라울 정도로 매끈하고 균질하다. 불길 속에서 누군가를 끌어안은 일도, 심정지 환자를 계단참에서 소생시킨 일도, 벌집 제거를 위해 사다리 꼭대기에서 땀과 독침에 전율한 순간도, 모두 “안전 조치 후 귀소”라는 여섯 글자에 평평하게 눌린다. 표 위에서 사건은 시작과 끝이 명확한 서류 문장으로만 존재하고, 현장의 결은 매끈한 보고 라인의 어휘에 흡수된다. 하지만 오기택은 그 표를 볼 때마다, 숫자와 단어가 결코 붙잡지 못하는 다른 층위를 떠올렸다. 출동 현장의 공기 밀도, 벽에 스민 열기, 호흡기를 통과해 들어오는 연기와 금속 냄새,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 그리고 구조 대상자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 전해지던 체온의 변화. 이 감각들은 문서화될 수 없고, 보고서에는 단 한 줄도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들이야말로 ‘실적’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진짜 내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감각을 오래 견디다 보면, 보고서의 평면성과 현장의 입체감 사이에서 묘한 현기증이 찾아온다.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묘사했던, 사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그 본질의 무의미함을 직시할 때의 비위 거슬림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기택은 현장에서 돌아와 실적 내역을 작성할 때마다, 방금 전까지 몸으로 느낀 위험과 구체적 온도가 표 위에서 얼마나 손쉽게 무색해지는지를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목격한 살아 있는 것들이 숫자와 활자라는 형태로 납작하게 변형되는 부조리를, 온몸으로 감지했다. 그는 안다. 기록은 필요하다. 통계는 예산과 장비를 움직이고, 서류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기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비워지는 공간이 있다는 것도 안다. 위험이 있었으나 공식 분류상 ‘경미’로 처리된 화재, 심정지 환자의 심박이 돌아왔지만 도착 후 몇 분 만에 멈춘 경우, 행정적 사망 선고가 내려진 뒤에도 구조자가 끝까지 심폐소생을 이어간 장면… 이런 것들은 문서 바깥으로 밀려난다. 보고서 상에서는 ‘특이사항 없음’으로 처리되지만, 구조자의 신체에는 그 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는다. 오기택은 자신이 존경했던 한 선배의 방식을 떠올리곤 한다. 그 선배는 보고서에 쓰이지 않는 현장의 결을, 체계 안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보존하려 애썼다. 사진 한 장, 장비 반납 시의 구두 보고, 심지어는 회의 중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짧은 발언 속에까지 현장의 공기와 질감을 심었다. 그건 제도에 대한 충성이라기보다, 기록이 삭제하는 현실에 맞서는 은밀한 저항이었다. 오기택도 어느 순간부터 그 습관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그는 출동 때마다 두 개의 감각을 동시에 작동시켰다. 하나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절차와 형식, 또 하나는 보고서에 남지 않을 장면과 온도. 그는 이 두 가지를 나란히 품고 귀소했고, 책상 앞에 앉아 실적 내역을 작성하면서 그 간극을 온몸으로 느꼈다. 서류 위에 적히지 않는 순간들이 그의 손끝과 발목, 폐 속에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렸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구토’는 오기택에게도 반복해서 찾아왔다. 그것은 현장에서 직접 부딪힌 살아 있는 것들이, 단어와 숫자로 환원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바라볼 때의 감각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 사라짐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주는 진득한 불쾌감이 있었다. 그는 이 불쾌감을 지우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그것을 사명감과 함께 품고 있었다. 오기택에게 사명감은 기록의 형식 속에 완전히 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표 밖에서, 보고서의 마지막 행 너머에서, 그리고 숫자로는 결코 환원되지 않는 냄새와 온도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구토의 진동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아직 구조자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를 다음 출동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동력이었다. ![[hammy484_humanoid_lioness_dressing_in_military_decoration_anime_eabe9c18-f899-4c93-84bb-80eb9bdba1b4.png]] > [!summary] 관련 문서 > * [[이준상, 마지막 구조대원(2025)]] > * [[정해성, 불타는 서울(2025)]]